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갑판형 구축함 (문단 편집) === 미국의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리다 === 평갑판형 구축함들은 후속함인 패러것급 구축함이 건조되기 이전까지 미 해군의 유일한 구축함 전력이었던 데다가 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한 본격적인 구축함이었던 [[플레처급 구축함]]과 그 후속함이 배치되기 이전까지 미 해군 구축함 전력의 숫적 주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이전에도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에든 모습을 비추었다. U보트에 의해 처음으로 격침된 미 해군 구축함도 평갑판형 구축함이었고 [[진주만 공습]] 직전에 가장 먼저 일본 해군과 접촉하여 갑표적을 격침한 것도 평갑판형 구축함이었다. 1941년 중반부터 시작된 [[렌드리스]](Lend-Lease) 정책에 따라 미국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막대한 물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단 미국은 당시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원래 같으면 독일 해군도 미국 국적 선박에 대해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이미 독일 해군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실시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리 미국이라도 안심할 수 없었고 북대서양을 횡단하는 호송선단을 호위하는 영국 해군에 보조하는 식으로 미 해군의 구축함들도 북대서양 해역에 배치되어 선단 호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미 해군 구축함이었던 USS 루벤 제임스(USS Reuben James, DD-245)는 클렘슨급 구축함으로 아이슬란드에 배치되어 북대서양 항로를 지나는 호송선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루벤 제임스는 아이슬란드에서 뉴펀들랜드에 이르는 구간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루벤 제임스가 처음으로 수행한 호위 임무는 영국에서 출항해 북아메리카로 향하는 ON 20 선단을 호위하는 것이었다. 1941년 9월 3일부터 동해 10월 9일까지 동함은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임무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이번에는 캐나다의 핼리팩스에서 출발하여 영국의 리버풀로 향하는 HX 156 선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루벤 제임스는 그 전에 수행했던 것과는 반대로 뉴펀들랜드에서 아이슬란드까지 선단을 호위할 예정이었다. 1941년 10월 31일, 루벤 제임스는 U보트의 무선교신을 탐지하고 그 방향을 알려주는 장치인 HF/DF(High-frequency direction finding, 일명 Huff-Duff)에 신호가 포착된 것을 확인하고 신호가 확인되는 방향으로 U보트 색적 작업을 수행했다. 마침 U-552의 함장 에리히 토프(Erich Topp) 대위도 접근하는 루벤 제임스의 존재를 확인했고 어뢰를 발사할 것을 명령했다. 어뢰는 루벤 제임스의 좌현을 강타하여 전방 탄약고를 폭파시켰다. 이 공격으로 루벤 제임스는 순식간에 침몰했으며 160명의 승조원 중 45명만이 생존하였다. 루벤 제임스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최초로 격침된 미국 군함으로 기록되었다. [[파일:external/images.rarenewspapers.com/image051.jpg]]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 윅스급 구축함 USS 워드(USS Ward, DD-139)는 소해정 USS 콘돌(USS Condor, AMc-14)과 함께 진주만 주변 해역을 초계하고 있었다. 그러다 3시 57분경, 소해정으로부터 수상한 물체가 포착되었다는 신호를 접수하고 그 지점에 대한 수색에 들어갔다.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기획하면서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는 미 해군 함정에 대한 타격 수단으로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이용한 공습만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다. 공습을 가하면서 잠수함을 이용한 뇌격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형 잠수함을 무턱대고 진주만에 밀어넣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만 형태의 군항에 대해 잠수함을 집어 넣었을 때 어떤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지는 이미 스캐퍼플로우를 기습한 U-47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은 직접 잠수함을 진주만에 투입하는 대신 모잠수함-잠수정을 투입할 것을 결정하였다. 외해에서 모잠수함이 잠수정을 분리하면 잠수정이 진주만으로 잠입한 후 정박한 미 해군 함정에 대해 뇌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에 투입한 잠수정은 [[갑표적]]이었다. 갑표적은 2인승 잠수정으로 2발의 어뢰를 실을 수 있었다. 일본은 갑표적을 투입하면서 갑표적이 목표를 타격한 후 모잠수함으로 귀환하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 고려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의 자살 공격이었다. 진주만에 투입된 갑표적은 총 5척이었다. 갑표적 승조원 10명은 가족에게 작별의 편지를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 9명이 전사했다. 1명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고 전후 귀국했지만, 전사자들은 9군신이니 뭐니 하며 화려한 칭호를 붙이며 추앙하던 일본은 정작 목숨을 건 작전에서 귀환한 영웅에게는 --누가 일본 아니랄까봐-- 싸늘한 냉대로 화답하는 작태를 보였다. 6시 37분경 워드는 잠수정임을 확인하고 교전에 들어갔다. 이 때 워드가 발사한 4인치 포탄이 미 해군이 2차 세계 대전에서 처음으로 발포한 포탄이었다. 수 분 간의 교전은 4인치 주포 뿐만 아니라 폭뢰 공격까지 이어지는 등 꽤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6시 45분경 잠수정은 결국 침몰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워드는 잠수정의 확인, 교전, 격침을 모두 상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보고 내용이 이리 저리 돌다 보니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태평양 함대 사령관 킴멜 제독(Husband E. Kimmel, 1882~1968)에게 전달되었고, 결국 진주만 공습에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교전이 일어났던 해역을 수색하였지만 격침된 갑표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2002년 하와이 대학의 연구팀들이 격침된 갑표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격침된 갑표적을 분석한 결과 갑표적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4인치 포탄으로, 4인치 포탄에 의해 생긴 파공으로 인해 침몰한 것으로 결론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